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다

2021. 9. 24. 21:45About Chaelin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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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 얻은 기억의 시작, 그 이전부터 그림일기를 썼습니다. ‘최초의 기억 이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스물 한 권의 그림일기에 적힌 사건들 중 제대로 기억이 나는 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일기장에는 처음 듣는 해수욕장의 이름이 서툰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심지어 발바닥을 스치는 미역의 감촉을 적어두기까지 했는데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나로서는 일기 속의 일들이 그저 꿈에서 벌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어가 제대로 발달하기도 전부터 경험한 것들을 꼬물꼬물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저는 잘하든 말든 기록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첫 글의 제목을 "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켜서 시작된 일인 줄 알았지만 다섯 살 때의 습관이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요. 무엇 하나 꾸준하게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저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종이에서 디지털로, 일기의 진화를 겪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손이 두 개 뿐이라 빠르고 간편한 디지털 기록을 할 때면 종이 다이어리는 그만큼 채워질 시간을 잃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을 찾기가 어려워 두 매체 모두 불완전한 형태로 이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이 다이어리에는 날짜 간 공백이 생기고, 디지털 기록으로는 '보다 완성된 형태의 에세이를 써야한다'는 생각에 속도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홀로 좌절을 겪고 있는 찰나, 요즘 읽고 있는 <존 치버의 일기 The Journals of John Cheever>를 통해 그의 일기 대부분이 타자기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받아들이며 '일기는 무조건 손 글씨로 채워야 제 맛'이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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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기록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 말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부분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좋아하는 행위.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기록을 하는 사람의 본질을 단단히 지키기로 다짐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 일과 작업, 보고 들은 것, 취향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충실히 기록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이어리에 써두었던 다양한 주제들을 디지털로 이 공간에 차곡차곡 모아둘 생각입니다. 기록은 기억보다 힘이 세고,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작업이니 글을 쓰고 사진을 담는 것을 달리 참을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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