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여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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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 산책 - 고대 유적 기록물부터 현대 미술, 뉴질랜드 페미니즘 제2물결까지
본격적인 겨울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놀라운 건 장마라고 해서 하루 종일 흐린 우울한 날씨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몇 분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가, 금방 햇볕이 들었다가, 또 흐려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다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가 하기 때문에 꽤 재밌고 지루하지 않은 장마입니다. 하도 순식간에 바뀌어서 순번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햇빛과 비가 서로 겹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빛이 야자수 나뭇잎 끝에 달린 빗방울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귀고리의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제 생애 이렇게 활기찬 장마는 없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진 덕분에 자연이 아닌 문화 속에서 모험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Auckland Art Gallery / Toi O Tamaki) *2018년 5..
2022.02.05 -
안전지대 밖에서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였습니다. 엊그제 잠깐 우박이 떨어졌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남극 대륙과 열대 지방 중간에 위치한 남위 40도대는 지구의 감정 변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간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봄볕을 맞으니 북섬에서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어떤 일이 해결되는 시기에 맞춰 남섬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가족과 친구'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나온 지도 반년이 되었습니다. 한 달 뒤에는 제가 돌아올 줄 알았던 어머니는 늘 '그만하고 돌아오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제야 무언가를 시작한 것 같은 저로서는 이 모험을 중단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가족의 보호가 존재한다는 건 말도 못 할 행운입니다. 집을 떠나와 방랑객으로 푸대접을 받을 때면..
2018.09.23 -
어둠 속의 실루엣, 그리고 잊지 못할 밤
2018년 7월 16일 월요일 일요일 저녁, 오클랜드로 돌아갈 채비를 끝마쳤습니다. 보름 만이었지요. 한 달의 절반이라는 시간이 짧을 수도 있겠지만 90퍼센트의 시간이 일로 채워진 15일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일이 끝이 나니 무척 후련했어요. 마무리 현장 사진 촬영은 카메라를 소지한 제가 맡았습니다. 광각 렌즈의 과장미 덕분에 사진이 더욱 멋스럽게 찍혔어요. 이제 '웰링턴 - 오클랜드 9시간 드라이브'라는 마지막 관문만 남았습니다. 대낮에 출발할 거라 기대했는데, 또다시 일정이 미뤄져 창밖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하루를 더 낭비하느니 빨리 집에 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기는 했습니다. 액셀 페달에 남아 있는 힘을 보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밴의 묵직한 ..
2018.08.09 -
일요일의 웰링턴 산책 (2) ─ 판도로 빵집과 뉴질랜드 첫 가톨릭 미사
2018년 8월 5일 일요일 부둣가를 걷다가 성당으로 향하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로 발길을 돌린 건 허기가 느껴질 즈음이었습니다. 뉴질랜드 포트레이트 갤러리(New Zealand Portrait Gallery)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오전 10시 30분에나 문을 열어서 포기해야 했거든요. 스파크 와이파이존을 벗어나자 스포티파이 앱에서 듣고 있던 음악이 뚝 끊겼습니다. 오랜 세월 귀에서 음악을 거의 떼지 않고 살았지만 환경이 바뀌어 저도 이제는 덤덤하게 이어폰을 귀에서 뺍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모험을 결심하고 나서는 짐을 쌀 때부터 삶의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더 나아가 길 위의 생활자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살림살이를 더 줄여야 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습관'면에서도 마찬가지입..
2018.08.05 -
일요일의 웰링턴 산책 (1) ─ 고대하던 평범한 주말을 맞이하다
2018년 7월 26일 목요일 6월의 마지막 날부터 7월 15일까지 또다시 웰링턴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일주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일정이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두 배가 되었고, 그 기간 동안 현장 두 곳을 모두 마무리해야 하는 까닭에 체력의 한계까지 짜내야 했습니다. 지금껏 보아온 것들을 종합하자면, 한국이든 외국이든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건축 일은 변수로 인한 딜레이와 씨름하는 게 절반인 듯했습니다. 새벽에 숙소로 가는 길에 본 또 다른 키위 인테리어 회사의 직원도 밴 안에서 고단한 표정으로 쪽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현장이 클라이언트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탓에 종종 현장 외적인 일에 대한 책망도 모두 다 감내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마감이 매우 급한 상황이라 주말까지 쉬지 ..
2018.08.05 -
뉴질랜드 라글란에서 생일을 (2) ─ 마누베이 서핑과 중심가 산책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와나우 캠핑장의 아침 은은한 빛이 눈꺼풀에 닿습니다. 간밤에 꿈에서 봤던 물고기들이 머릿속을 희미하게 헤엄치고 다녔어요. 어, 이거 분명 길몽인데! 하늘이 생일 선물로 툭 던져 놓고 간 게 틀림없었습니다. 막연하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하니 잠에서 깨기도 전에 미소가 번졌어요. 생일은 하루 지났지만 이왕 주말에 낀 거 일요일까지만이라도 즐거운 기분을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4월 초 오포우티어 캠핑 이후로 드디어 두 달 반 만에 야외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입니다. 오포우티어에서 피톤치드에 취해 아침부터 정말 기분이 좋았거든요. 여기서도 얼른 상쾌한 아침을 누려야겠습니다. 앞좌석에 놔둔 세면도구와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차 안의 공기가 새벽처럼 으슬으슬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