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을 다루는 기록자

2021. 9. 30. 22:22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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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사진을 만나다


다이어리 말고도 중요한 기록 수단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글로 담지 못하는 것을 빛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는 도구, '카메라'입니다. 사진은 저에게 침묵을 허용해주는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순간도 침묵과 비슷하지만, 글은 단어와 문장을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저는 뷰파인더 속 풍경이 시간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느린 순간을 좋아합니다. 마침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다면 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사진은 기록의 수단으로도 훌륭하지만 자기 표현의 한 장르로써 사진을 대하는 마음도 설렙니다.

사진에 대한 욕구가 일었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DSLR카메라를 써보고 싶었지만 따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고 하고 있던 공부와 전혀 관련도 없어서 그 당시에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렇게 카메라에 대한 열망만 더욱 커져 갔어요. 대학생이 되어서도 카메라가 너무 가지고 싶어 매일 손에 카메라를 쥐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는데, 운 좋게도 대학교 3학년 때 딱 눈여겨보고 있던 중고 카메라 가격만큼의 추가 장학금이 들어왔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밤거리를 배회하던 날, 우연히 모자란 액수를 채울 수 있는 지폐 한 장을 주웠다고 하던데 마치 그런 상황과 비슷한 행운이랄까요. 물론 누군가가 생계를 위해 절박한 마음을 품는 것에는 비할 수 없지만, 저도 카메라에 있어서는 꽤나 간절히 염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매한 첫 카메라는 Sony Nex-5n. 2013년 당시 바디와 렌즈 두 개(18-55mm F3.5-5.6, 16mm F2.8)를 포함해 중고가로 60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중고물품 거래가 처음이라 사기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김해로 직접 찾아간 기억이 납니다. 뱃속에 아기가 있는 젊은 엄마가 카메라가 든 박스를 들고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지요. 본인은 당분간 사진 찍으러 나갈 일이 없을 것 같다며 잘 써달라고 하시더군요. 입문용 카메라였지만 표현하고 싶은 장면을 좀 더 그럴듯하게 담을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카메라를 구입하고 나서 혼자 취미용으로만 찍고 다녔다면 사진을 이처럼 소중하게 여길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점은 20대 초반에 사진으로 스스로를 표현을 하는 분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차례 사진전을 함께 했고, 지금까지도 그분들과 잔잔한 영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쎄오님’이라고 부르는 진주 다원의 배길효 원장님은 예술 그 자체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인데요. 그 시절 쎄오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채린, 너는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
형식을 정해 마음껏 표현하면 된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던 저에게 이곳 사람들과 쎄오님의 응원은 굉장한 용기를 주었습니다. 의지를 확인했으니 ‘주제를 표현할 적절한 형식’을 풀어가는 게 그 다음의 숙제로 남았지요.

Fujifilm X-Pro2 Body with Olympus G-Zuiko 50mm F1.2 ⓒ2021.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그러다가 사진 작가인 지인으로부터 Sony A77를 구매해 1년간 사용했고, 2016년에 제가 원하는 모습과 기능을 갖춘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카메라 Fujifilm X-Pro 2를 발견해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후지필름이 꽤나 대세가 되었지만, 그 시절에만 하더라도 '그 돈으로 그걸 왜 사니?!'라는 소리를 제법 들었거든요. 부산 광복동 줌인 카메라에서 XT1을 2박 3일 대여해 이리저리 찍어보다가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던 때가 기억납니다. '바로 이거다!' 그렇게 반납하면서 바로 X-Pro 2와 35mmF2를 데려왔습니다. 여행비용을 제외하고 제 돈 주고 산 가장 비싼 물품이었지요.

앞으로 사진으로 다루고 싶은 언어는 '평온'입니다. 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보았을 때 그 속에서 푹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부터 평생을 이 주제로 작업을 쌓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불안과 눈물, 겁이 많은 사람이라 사진으로까지 아픔을 추적하고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작업들은 저보다 더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잘 해낼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도 다른 주제에 관심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는 생을 살아가다가 만난 장면들을 기록한 사진들이 하나의 추상적 공간이 되어 그때의 시간과 풍경에서 쉴 수 있는 작업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사진 속의 공간들이 실제 공간은 될 수 없어도 시각적으로 공간적인 기능을 하며 정서적으로 쉴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평온을 수집하는 프로젝트가 삶 전체의 든든한 정서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평온을 절실히 찾는 사람


이렇게까지 평온에 강하게 끌리게 된 것은 그 반대 감정인 불안과 두려움에 지긋지긋하게 질려버린 까닭도 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온 동네가 자기 세상인 마냥 휩쓸고 다녔지만, 세상이 무섭고 끝 없고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걸 알고 나니 한껏 움츠러들더라고요. 마치 물에 젖은 종이가 구겨진 채 그대로 마른 것처럼 마음이 탁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세상살이가 원래 야생이라고들 하지만, 돈을 벌고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숨이 턱 막히는 불안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잔뜩 주눅이 든 상태가 되고 말았지만, 제가 부정적인 감정 만큼 긍정적인 감정도 무척 세밀하고 다양하게 느끼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원래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람이구나. 그때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과 사진, 기록. 예전에 쎄오님이 말씀해주신 '주제를 표현할 적절한 형식'은 바로 세상의 부분을 떼어내어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과 끊임없는 기록이었습니다.

<사적인 파라다이스>는 평생에 걸쳐 이어가는 프로젝트입니다. 최후에는 '내가 살면서 모을 수 있는 모든 평온의 집합체'를 세상에 내놓고 참 재밌게 살다 가는구나! 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형체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기록하는 수밖에요. 그게 제게는 가장 즐겁고 자연스러운 일이니 계속 하다보면 못 이룰 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창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과 만나는 형식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원하는 분야가 있다면 공부가 형식이 될 수도 있겠고, 새로운 직장에 입사했거나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나름의 형식으로 관계를 맺어가고 실적을 쌓게 되겠지요. 어느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예술가라면 자신을 표현하는 적합한 도구와 시그니처를 고민하겠지요. 저는 그저 진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성질에 맞는 일들로 벌어먹고 살며 각자의 평온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에게는 그 일이 바로 '기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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