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인 집중에 도움이 되는 장소와 환경 찾기

2022. 1. 31. 22:07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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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즐겨 기록하는 장소들을 떠올려볼 때, '과연 한 사람의 자아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소란과 적막을 오갑니다. 소음이 들리지 않는 배 위의 작업실에서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음악으로 떠들썩한 어느 바에서도 비슷한 집중력과 즐거움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극단적인 환경이지만, 이 두 장소의 교집합을 찾아보면 기록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드러날 것 같네요. 다양한 장소에서 2시간 이상의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1. 등을 기댈 수 있는 무언가

 

한 번은 어느 늦은 밤, 10년 만에 다시 본 영화 <비커밍 제인>을 보고 그동안 고여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마그마처럼 분출되기 직전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한 가닥의 생각만 뽑아내면 더 깊은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타이밍이었지요. 작은 노트와 연필만 가지고 집 밖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 앞에 글을 쓰러 나온 적은 처음이었어요.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바닷가 쪽으로 나 있는 산책로로 향했습니다. 우거진 나뭇잎들이 높이 솟은 빌딩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작은 손바닥으로 가리기 위해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중앙 광장 가로등 아래에 앉아 뱉어 내고 싶었던 문장들을 두서없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게걸스럽지 않게, 한 마디씩 차근차근, 초침처럼 멈추지 않고 글을 썼어요. 그때 쓰는 글에는 문법이나 논리적 전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떠오르는 솔직한 생각들을 부지런히 받아내는 것에만 충실했어요. 적당히 찬 밤공기가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고 어렴풋한 생각 덩어리들을 단어로 좇아가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늦은 밤에도 부지런히 운동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곳은 관광지이고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라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잠시. 20분이 채 되지도 않아 허리와 척추,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등을 기대지 않은 채 바른 자세로 글을 쓰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불편함이 글쓰기의 감흥을 조금씩, 현저하게 떨어뜨렸습니다. 무의식의 가까이로 건너가야 하는데, 통증과 불편한 자세는 지극히 현실의 영역이라 몰입의 고리가 금방 끊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른 장소를 찾다가 동백섬 길목에 있는 거대한 상업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자본이 넉넉한 도시의 밤은 여기저기 불빛이 많았고 영업이 종료된 후였지만 야외 테이블과 의자가 접히지 않은 채 그대로 펼쳐져 있어 잠시 앉아 있을 곳이 필요한 이들을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거기 앉아서 아까 썼던 글의 3배 정도 되는 분량을 써내려갔습니다. 오랜 시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세가 내 몸에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특히 등을 기댐으로써 허리와 목의 압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그저 등을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됩니다. 의자의 등받이가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무 기둥, 계단, 벽, 침대나 소파의 측면 등도 훌륭합니다. 기댈 수 없다면 차라리 눕는 것이 나아요. 그런 의미에서 침대 위나 소파 위의 정자세, 아니면 잔디 바닥이라도 가능합니다. 다만 앉은 자세를 벗어나면 중력을 일부 거슬러야 하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쓰기에는 불편함이 큽니다. 그럴 때는 휴대폰 등 디지털 기기를 적절히 이용하면 좋습니다.



2. 음향은 장벽이 된다

 

형체는 없지만 똑같은 공간을 순식간에 다른 공기로 바꾸어버리는 마법은 '음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개인 장소가 아니라 카페나 바 등 상업 공간을 이용할 때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이어폰을 준비합니다. 옆 사람의 대화가 과하게 들려오거나 음악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할 때 그 순간을 벗어나는 수단으로는 역시 귀를 틀어막아주는 게 최곱니다.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없다면 그곳에서 들릴 법한 소리를 이용해 감각으로 머물 수 있습니다. 이동할 수 없지만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있을 때 음악은 이를 상쇄시켜주기도 합니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가끔 여행지에서 만난 특정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하고 싶을 때에도 음향의 힘은 탁월합니다.

저는 역사적인 인물의 생가나 생활 공간을 그대로 살린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책상, 작업실, 발걸음이 닿았을 복도와 서재, 거실, 부엌을 마치 이곳에 초대된 손님처럼 거닐며 사진으로 담는데요. 여행이 끝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그들의 공간이 생각나면 찍어두었던 사진을 다시 꺼내봅니다. 그 공간을 닮은 음향을 찾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으면 기분 좋은 감각의 혼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특별히 듣고 싶은 음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유튜브에서 '원하는 키워드 + Ambience(분위기)'를 검색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책장 넘기는 소리와 나무 바닥 소리 등이 들리는 Library Ambience, 나지막한 재즈 음악과 비 내리는 날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Coffee Shop Ambience, Bookstore Ambience 등을 즐겨 듣습니다. 아래 포스팅에 엄선한 플레이리스트 3곡을 올려두었으니 비슷한 영감을 찾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몰입을 위한 백그라운드 사운드

지금 당장 집중이 필요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혼자 있는 공간이든,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이든 다양한 환경들이 당신의 집중을 방해하고 있다. 충분히 휴식을 가져도 일로 곧장 뛰어

www.privateparadise.org

 

기록을 위해 가장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 조건을 찾아보니 제게는 등받이와 음향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여기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추가로 고민해볼 수 있겠네요. 디지털 기기의 힘을 빌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기록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천천히 종이 위에 써 내려가면 됩니다.

 

 

 

3.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 찾기

 

최소의 조건을 파악했으니 최적화를 할 수 있는 요소들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글을 쓰기 위해서 그리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독립된 공간이 필요한 이유에는 마냥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공간의 어느 부분이 충족되지 않는지, 내가 정말로 머물고 싶은 환경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은 그 다음 순서이고요. 이 집에 제 방이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에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다보면 최적의 공간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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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서 생산적인 활동이 힘든 이유

 

- 식물에 둘러 싸인 공간을 오랫동안 원했다. 그렇지만 내 방은 동틀 때만 햇볕이 잠깐 든다. 그늘진 공간이라 식물을 키워도 금세 상태가 좋지 않아진다. 몇 달 전, 가장 좋아하는 관음죽 화분을 방에 들였다가 다시 거실로 보내야 했다. 식물이 힘차게 자라지 못하는 공간이라니, 나도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기운이 쑥 빠지는 건 잠을 잘 때에나 도움이 된다.

 

- 공간이 환했으면 좋겠다. 내 방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쪽 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있기는 해도 길쭉한 공간이라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는다. 내 작업 책상은 안쪽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딱히 옮길 수도 없다. 창가 자리에는 침대가 놓여 있다. 예전에 안쪽에 침대를 두었다가 잠자리가 어수선해 바꾼 위치다. 벽 쪽 구석에 있어서 그런지 책상에 있어도 총명하고 맑은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 텅 빈 공간에 있고 싶다. 내 방은 이미 꼭 필요한 만큼의 가구들로 가득 찼고, 이 중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구도 많아서 뭔가 기운을 내야할 때면 일단 방부터 벗어나고 싶다. 요즘은 널찍한 부엌 책상에서 작업을 많이 하지만, 여기도 집 안의 가운데라 빛이 닿지 않는다. 바깥의 양기를 가득 머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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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동안 백신을 맞고 집 안에서만 지내면서 글쓰기와 작업에 집중이 되지 않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을 완전히 바꿔보기로 했어요. 왜 불편한지 생각해보고 현재 환경에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니 공간 사용에 대한 암묵적 합의에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떠나고 싶고 답답하기만 했던 공간을 살펴보니 가장 좋은 기운을 가진 곳을 오롯이 식물들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그냥 식물이 잘 자라고 있는 공간으로 내가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곧이어 선물 받은 소파용 이동식 책상이 생각났습니다. 그 책상은 어느새 엄마의 물건 수납 공간으로 구석에서 엉뚱하게 쓰임새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노트북 하나 올리면 꽉 차는 작은 책상을 거실 창가로 가져가서 좋아하는 관음죽 화분 근처에 두었습니다. 마땅한 의자가 없어 제 방에 있던 의자를 가지고 나왔지요. 이왕이면 갑갑함을 줄이기 위해 아파트 틈새로 도로와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켠 지 오래된 에어컨 뒤로 콘센트가 있어 5구짜리 멀티탭을 연결하고 창 밖의 시야를 가리는 화분의 위치를 다른 낮은 화분과 바꾸었습니다. 앞에는 큰 화분이, 왼쪽에는 작은 화분들이 있어 실재하는 흙과 풀에 가까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거실 중앙이라 트여 있었고 제 시야에는 화분들과 창 밖의 풍경이 주로 담겼습니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도 충분했고요. 이렇게 같은 공간 안에서 자리를 바꾸었을 뿐이지만 부정적인 심리가 생성될 경로를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임시로 다른 쓰임새가 있던 이동식 책상을 사용했으나 이 공간의 효율을 체감했으니 적당한 접이식 테이블을 차근차근 구하면 될 일입니다. 제가 사용한 것은 거실 구석의 1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적은 비용과 움직임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반나절 이곳에 머물렀더니 내가 느끼는 에너지도 평소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요즘은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일과 생활의 분리가 되지 않아 곤혹스러운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혹시 집 안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고 몰입도 되지 않을 때 심리적으로 불편했던 요소들을 찾고 '음향'과 '집 안의 장소'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벽장을 사무 공간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저처럼 창 밖이 보이고 탁 트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공간의 쓰임은 그곳을 쓰는 사람의 재량이니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여러 가지 실험해보는 것도 일상에 또 다른 재미와 발견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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