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La Carte N'est Pas le Territoire) / MYOP / 부산 해운대 고은사진미술관

2022. 2. 13. 16:02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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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 이사 온 지 8년이 다 되어 갑니다. 요즘은 사람들에게 이 동네는 제가 평생 동안 살고 싶은 곳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다, 숲, 요트경기장, 좋은 식당과 카페들, 그리고 고은사진미술관. 이 모든 것들을 걸어서 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올해 초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반가운 전시 소식을 듣고 첫날부터 찾아갔으나 엄격해진 백신 패스 적용으로 인해 문 앞에서 리플릿만 받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쉽게 찍는 백신 접종 완료 QR코드지만 제게는 시간과 돈, 건강을 잃으며 힘겹게 얻어낸 전리품입니다. 마침내 2차 접종 14일째,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바로 고은사진미술관이었습니다. 종종 피드에 전시 소식이 올라왔지만 미리 보지 않기 위해 얼른 넘기곤 했었지요. 텍스트로 먼저 마주한 전시를 드디어 눈에 담는 날입니다.

 

 

 

포스터가 붙은 돌담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La Carte N'est Pas le Territoire / The Map is not the Territory)"는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을 연구한 1930년대 논리학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rzybski가 처음 쓴 표현입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개개인은 절대로 현실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대신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신념(beliefs)의 꾸러미만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 속의 현실과 실제 현실은 다릅니다. 하나의 영토에 여러가지 지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 세계는 각자의 머릿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인식 속의 추상적인 지도는 절대 현실 속의 영토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다양한 시공간에 파견된 작가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목격을 빌려올 수 있지요. 2022년 고은사진미술관 해외교류전의 첫 주인공인 프랑스 사진가 집단 MYOP은 이러한 현실과 인식 사이의 차이를 기본 모티프로 삼고 있습니다. 작가들이 카메라를 통해 수집한 '지도'를 산책하며 오랜만에 전시를 만끽했습니다. 아래에 각 섹션의 전시를 담은 사진과 작업을 소개하고, 작가별로 전체 작업물을 볼 수 있는 MYOP 웹사이트 링크를 정리했습니다.

 

 

1. TIME-LAPS / Installation Collective

타임랩스 / 집단작업

 

 

 

Time-laps by MY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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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타임랩스 - 집단 작업> 섹션. 1979년에서 2019년까지, 322년에 걸친 MYOP 그룹 작가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집단이 추구하는 시각이 처음 소개되고 드러나는 섹션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1913년 작품『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김인환 번역, 『스완네 쪽으로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문예출판사, 2011)에서 인용된 구절과 함께 감상하면 그 긴 시간의 맛이 함께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고, 사물이 파괴되고, 과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더욱 연약하긴 해도 더욱 강인하게, 무형이긴 해도 더욱 집요하고 충실하게, 오직 그 냄새와 맛만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남아서,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생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이다. 그 냄새와 맛의 미세한 물방울 위에 그 거대한 추억의 건물을 꿋꿋이 떠받치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13)

 

 

 

 

2. Entre Chien et Loup / Ed Alcock

개와 늑대 사이 / 에드 알콕

 

Ed Alcock Photography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2016년 겨울,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모르비앙의 길을 여행한 작가 에드 알콕. 그의 작업 노트에 의하면, 이 전시 섹션은 동물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사람들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꿈을 탐사하면서 인간과 야수 사이의 사라져 가는 연결고리를 찾아본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초상 사진과 함께 그들이 손으로 직접 쓴 비밀스러운 글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Entre chien et loup | Myop

Entre chien et loup by Ed Alcock, with an accompanying text by Vincent Jolly Exhibition at the Festival Photo La Gacilly : 3 June - 30 September 2017 “Last winter,” writes Ed Alcock, “I travelled the roads of the Morbihan, in Brittany, to explor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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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La Vie Sauvage / Pierre Hybre

야생의 삶 / 피에르 이브르

 

 

 

Pierre Hybrid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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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손길이 닿지 않은, 프랑스의 가장 외진 곳을 탐험하고 싶었던 작가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스페인 접경 지역인 피레네 산맥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히피들의 시간은 지나가버렸지만 그 자유로운 정신은 여전히 외진 산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회규범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실험할 수 있고 공동체 정신이 충만한 곳. 피에르 이브르는 이들의 삶이 중심이 된 자연을 담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로움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담아냈습니다. 인생 실험을 위해 뉴질랜드로 떠나고 사진을 담았던 나의 경험과 가장 관련이 깊은 전시였습니다. 제가 목격한 뉴질랜드의 대자연과 피레네 산맥이 겹쳐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La vie sauvage | Myop

La vie sauvage La vie sauvage / The wild life I met on a mountain path a young man and his wolf. His name was Inti, the Inca’s name of the Sun god. I remember a sentence of Inti « here it is simple to live happily ». In this serie, I explored the 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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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eirut 75-15 / Stéphane Lagoutte

베이루트 75-15 / 스테판 라구트

 

 

 

Stephane Lagoutte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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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베이루트로 데려와 준 레바논 여자와 사랑에 빠진 사진작가가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도시의 틈을 기록했습니다. 스테판 라구트는 레바논의 버려진 고급 호텔 지하의 나이트클럽에서 오래된 사진 원판들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1975년 내란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기 전의 온전한 삶이 담겨 있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담은 사진과 과거 원판 사진을 중첩하여 작업했습니다. 전시 소개글을 쓴 사무엘 두(Samuel Doux)는 '오랜 별거 후 다시 만난 부부처럼, 오늘날의 사진들이 어제의 사진들 위에 놓여 있다. 1975-2015의 베이루트. 중첩된 시간 속에서 두 외로운 영혼이 만나서 포옹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큰 벽에 빼곡히 모여 전시된 사진들이 마치 오래된 영상처럼 보입니다. 쪼그려 앉아서 오래전에 불이 켜져 있던 건물 사진을 바라보았습니다. 유령 같은 시간의 흔적에 먹먹해졌습니다.

 

 

Lebanon / Beirut 75-15 | Myop

Lebanon / Beirut 75-15 Beirut is layered, saturated. It is a desperate syncretism, at once beautiful and monstrous. I have rarely seen a city strike so violently its inhabitants. The war is still so close, though a thick layer of dust has covered everyt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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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ulina/Insula / Julien Pebrel

술리나/인술라 / 줄리앙 페브렐

 

 

Julien Pebrel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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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프랑스 역사의 한 부분이 끝나고 루마니아로 새 삶을 시작한 다뉴브 강어귀의 술리나 지역을 담았습니다. 이곳에는 과거에 다뉴브 위원회가 있었고 터키, 그리스, 독일, 프랑스, 러시아, 리포반과 우크라이나 코사크 상인들이 있었고 10개의 영사관이 있었다고 해요. 오랜 시간이 지나 예전의 모습을 잃었지만 이 도시는 여전히 단단한 일상과 평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 더욱 몰입했던 섹션입니다.

 

 

Sulina, the european Far-East | Myop

Sulina, the european Far-East At km 0 of the Danube, Sulina's old lighthouse is only a symbol. Eastern gate of the European Union since the accession of Romania in 2007, it illuminates no more cargo. At the beginning of last century, the Black Sea pulled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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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L'Amérique des érivains / Guillaume Binet

작가들의 미국 / 기욤 비네

 

 

Guillaume 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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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작가는 오래된 캠퍼밴을 타고 수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된 지리적 환경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모험 자체가 창조적 과정이었고, 가족 구성원이 한 팀이 됨으로써 요구되는 헌신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가족은 긴 여정 끝에 <작업, 규율, 규칙성>이라는 단어를 간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며 글을 썼던 과거의 작가들처럼 기욤 비네와 가족들 또한 이 환경에 적응하며 그들만의 모험을 완성해나갔습니다. 핸들 너머로 도로가 펼쳐져 있는 대형 사진 주위로 다양한 장소와 시간이 담긴 사진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낯선 길 위로 모험을 떠나고 싶은 욕망을 부추킵니다. 동행자가 가족이라는 점은 더욱더 좋네요.

 

 

USA - On the road | My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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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writers | My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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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otel Paradiso / Alain Keler

모텔 파라디소 / 알랭 켈레

 

 

Alain Keler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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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의 1925년 소설 『침니스의 비밀』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 보리스의 고향은 발칸입니다. 책 속에서 이곳은 "주민은 거의가 산적이고, 취미는 국왕 살해와 혁명"이라고 묘사됩니다. 작가는 피정복민의 무거운 역사가 쌓인 이 땅을 흑백 필름 속에 담았습니다. 현대의 발칸 반도는 그간의 악명과는 달리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폭력 범죄율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낙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텔이 이 프로젝트의 타이틀이 된 것처럼, 발칸에 깃들어 있는 폭력성과 깊고 짙은 슬픔도 해소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Motel Paradiso | Myop

Motel Paradiso Motel Paradiso The men sneak up along the walls, like shadows, along the tracks of the railroad, along the roads. Always on the sidelines as if not to be noticed. Wandered by life, by wind, by time, as banned by the rest of the world. Only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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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다 보고 나서 고민 끝에 방명록을 남기고 왔습니다.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아 오타를 남겼는데, 전시가 끝나기 전에 다시 가서 슬쩍 고치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히히) MYOP이라는 이름은 폴 엘뤼아르의 시에 대한 오마주라고 합니다. 마침 가지고 있던 마스킹 테이프가 구절 속의 '막막한 바다'와 어울리는 것 같아 함께 붙였습니다. 제 사진도 언젠가는 충분한 크기로 프린트되어 소개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번 MYOP의 전시를 통해 시간과 결합된 사진 작업의 의미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사진을 통한 모험적인 감각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이름이 탄생한 폴 엘뤼아르의 시를 옮겨봅니다.

 

끈질긴 내 두 눈,
내가 가라앉던 그 막막한 바다 위로
언제까지고 떠진 채로 있던

Mes Yeux, Objets Patients (=MYOP)
Étaient à jamais ouverts
Sur l'étendue des mers
Où je me no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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