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운명의 책 만나기 - 제주 섬타임즈

2021. 12. 4. 18:10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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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짐을 챙기면서 읽고 있던 책을 집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낯선 공간에서 책을 고르는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 예전부터 그렇게 골라낸 영화와 책 속에서 그때의 저에게 필요한 말과 장면들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제가 담지 못한 장면, 쓰지 못한 문장, 그리지 못한 그림을 우연히 발견하고 마주하는 기쁨은 지친 몸과 마음에 진실로 활기를 가져다주거든요.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으로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고 싶었지만, 책방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활자에 대한 갈망을 한껏 끌어올리는 것도 꽤 신나는 일 같았습니다. 패티 스미스는 '책 없이 비행기를 타는 상상만 해도 파도처럼 공황이 덮쳐온다'라고 말했지만 참아왔던 기쁨은 더욱 크게 울려 퍼지는 법이니까요. 여행을 떠나기 전 제주에 있는 독립 서점들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부지런히 지도에 표시해두었습니다. 이동 중에 시간과 동선이 적당히 들어맞는 곳이 나오면 어디든 방문하기 위해서지요.

 

│책방 섬타임즈


'누구에게나 있어요. 햇살 가득한 내 마음의 작은 섬'
(제주시 애월읍 소길 1길 15 / 11:00 - 18:00 일, 월 휴무)

 

출발 지연으로 제주 공항에 2시간이나 늦게 도착해 렌터카를 찾고 부랴부랴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첫째 날의 모든 동선은 서귀포 숙소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어요. 애월에 있는 책방 섬타임즈는 '섬'이라는 단어를 특별하게 여기는 제게 단연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낯설고 반가운 제주 공기를 들이마시며 애월로 향했습니다. 책방 바로 옆에 관공서 건물이 있어 주차가 편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깥에도 스피커를 틀어 놓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책방 근처 버스 정류장 안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그 안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고 한 청년이 황금빛으로 변한 햇살을 맞으며 연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곡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1분이 넘도록 실수 하나 없이 연주가 이어졌어요. 차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 만연한 햇살과 그 속에 섞인 피아노 소리. 청년이 연주를 멈추고 짐을 챙겨 정류소를 떠날 때까지 시간이 멈춘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많이 늦었으니 빨리 둘러보고 이동하자는 엄마의 재촉이 없었다면 저 청년에게 인사를 건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상 엄마가 지켜보고 있으니 멋진 연주였다는 간단한 인사치레 한마디도 걸기가 애매했거든요. 이번 여행의 파트너가 엄마라는 사실은 기쁘기 그지없지만, 어쨌거나 엄마가 곁에 있다는 건 그런 일입니다.

 


커다란 방충망을 열고 책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부모와 어린아이 두 명이 있는 가족 손님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한없이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깁니다. 일정이 가득한 육지 여행객이라기보다는 잠시 주말 가족 나들이를 떠난 동네 이웃 같습니다. 책방 사장님은 읽고 계신 책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습니다. 아까 밖에서 만난 햇살은 쌓여 있는 책들 위로 망설임 없이 쏟아지고 있네요. 사장님이 책방 인스타그램에 소개글로 써두신 말처럼 이곳은 햇살 가득한 섬 속의 책으로 가득한 작은 섬이었습니다. 예쁜 빛이 사라지기 전에 사진을 한 컷 담고 책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활자에 대한 욕망을 해제하는 순간입니다.

 


예술 서적들이 모인 서가를 살펴보다가 나란히 꽂혀 있는 김환기·김향안 선생님의 책을 발견합니다. 몇 년 전, 김향안 작가의 <카페와 참종이>에 푹 빠져 있었던 게 생각나 반가운 마음에 에세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다만 책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하여 이미 카메라와 렌즈들로 묵직해진 가방에 이 책까지 더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아쉽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이번 여행의 운명이 아닌 것입니다. 입구 쪽으로 나가면서 새롭게 눈길을 끈 건 청춘 문고에서 나온 한 손 크기의 작은 시집들이었습니다. 그중 한 책이 마음에 들어 이번 여행에 함께 하기로 했다. 독서에 몰입하신 사장님의 침묵을 잠시 깨뜨리고 책을 계산하다가 '작가의 방'이라고 마련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운영되지 않았지만 구석에 놓인 타자기에 사로 잡혀 결국 사장님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즐길 수 있는 큰 책상과 작은 책상, 그리고 소파가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작업 공간과 흡사한 모습이었어요. 이렇게 따스한 공간을 매일 볼 수만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청춘 문고의 작은 시집들 중 제가 고른 것은 이도형 시인 <오래된 사랑의 실체>입니다. 스르륵 훑은 몇 페이지의 문장이 마음을 저리게 했습니다. 오래전 일부러 언어화하지 않았던 감정들이 타인의 손끝을 통해 대신 표현된 것 같았거든요. 아물어야 했으나 미처 회복되지 못한 생채기가 시인이 모은 낱말에 간지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여행 중에 시집을 읽는 행위는 습관을 벗어난 언어들의 결합 덕분에 감각을 더욱 낯설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사랑의 실체> 속에는 바다 이미지가 다채로워요. 가고 싶었던 카페에 앉아 나는 책을 읽고 엄마는 묵주기도를 이어가고 있을 때  눈앞의 바다 풍경에 섞여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듯 시집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운명처럼 고른 시집은 가방에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지만 여행 내내 우주에 1인분만큼의 공간을 움켜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 책을 고르게 되었을까 생각을 따라가 보았더니 내 속의 오래된 사랑은 먼지와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문장들이 먼지를 걷어내 준다면 나도 실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모양입니다. 시집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p.15)', 이 역설 밖에 근접한 답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겹겹이 쌓은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 사랑이든 적막이든 부지런한 시간이든 꿈이든 여행이든 일이든, 파도가 치듯이 받아들이고 뱉어내는 것. 우리가 겪는 사건과 시간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게 전부인 삶을 살고 있네요.  

 

 


 

파도는 모든 중심에서 모든 바깥으로

모든 바깥에서 다시 모든 중심으로

들어왔다가 물비늘을 갈아입고

나아갔다.

 

우주의 하고 많은 별들 중에

별이 되지 못한 행성과 그 행성을 맴도는 위성이 있고

그들의 오랜 사랑 때문에 이뤄지는 조수간만의 차

 

한 방울 포말인 듯 쉽게 부서지는 환희는 연약하지만

다시 또다시 새로운 인력에 이끌려

파도로 내딛고 마는 그리움

 

떨어져 있는 당신 마음의 모래톱에도

이토록 무한할 것처럼 물이 차는가

 

무너지던 얼굴에 토말의 바람이 다가와

증발하는 세상으로 마지막 표정을 그려주었다.

 

날이 무딘 눈물의 칼로

다가오는 하늘에 바다와 같은 결의 무늬를 새긴다

 

세상의 끝에서 우리는 겹겹이 마주할 것이다

 

(p.117 - 118, '세상의 끝을 조각하다' 중에서) 

 


 

  책방을 나서자 햇살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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