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일요일 오전의 드라이브, 제주에서 미사 보기(성 이시돌 센터 삼위일체 대성당)

2022. 2. 4. 22:42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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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기운에 잠이 깼습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온돌방을 예약한 덕분에 온 몸을 따뜻하게 지지며 피로를 풀었습니다. 아침은 꼭 먹어야 하는 엄마와 호텔 조식을 좋아하는 저였지만 솔직히 조식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방도 콩알만 하고, 주차시설도 무척 열악했거든요. 지난밤에 호텔에 조금 늦게 도착하니 이미 주차공간이 꽉 차 있어서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흙바닥 주차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텔 바로 앞에는 주정차 견인 표지판이 떡하니 세워져 있어 찝찝한 마음에 갓길 주차는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으슥한 공터를 나와 호텔이 있는 쪽으로 언덕을 내려가며 여행이 주는 예기치 못한 불편에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밤에 밖을 봤을 때 차를 주차해둔 언덕이 공포영화 속 묘지처럼 보였는데 아침에 보니 저 멀리 조그만 산봉우리가 보이기는 했습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그리 자랑하던 '마운틴 뷰'는 사실 '주차장 뷰'였던 겁니다.

- 살다살다 주차를 이렇게 멀리 흙 언덕 위에 하는 호텔은 처음이야!

- 그래도 엄마는 온돌방에서 뜨끈뜨끈하게 푹 자고 일어나서 너무 좋네.

엄마와 함께 뷔페가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QR 체크인을 한번 더 하고 조식 쿠폰 두 장을 직원에게 건넸습니다. 대형 스크린으로 요즘 팝송 음악이 영상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고, 정갈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분주히 주방과 홀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혼자 여행 온 사람, 연인들, 가족들이 듬성듬성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었어요. 메뉴도 한식과 양식으로 잘 준비되어 있었고 심지어 맛있기까지 했습니다. 이 호텔은 객실의 편의성을 대폭 줄인 대신 조식 서비스에 조금 더 정성을 들인 모양입니다. 이 정도면 숙박비의 절반은 음식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배불리 챙겨 먹고 첫 여정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성 이시돌 목장 근처. 일요일이라 엄마와 함께 미사를 보기로 했습니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이동할 예정입니다.

- 엄마, 이제 열게요!

쌩쌩 달리는 국도를 벗어나 자그마한 길로 들어서고 속력을 30km/h 정도로 낮췄습니다. 뒤 따르는 차도 없고 건너편 차도 없는 한적한 산길이었습니다. 카브리올레의 탑을 열자 뭉친 바람이 순간적으로 들어왔다가 사방으로 풀려나갔습니다. 실내와 바깥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로 운전하는 것은 제가 여행 중에 가장 느끼고 싶은 감각이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가장 황홀감을 주는 드라이브는 빠른 속력도, 터질 것 같은 배기음도 아니고,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한적한 길을 완전 개방인 상태로 그저 흘러가는 일입니다. 성 이시돌 목장까지 운전하는 길은 제주를 운전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이빙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목장 근처에 있는 '금악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미사 시간인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사람이 없어서 조금 의아했어요. 분명 시간을 확인하고 왔는데 출입문이 닫혀 있어 지나가시는 신부님께 여쭤보니 이곳은 일반 신자들이 아닌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이 미사를 보는 성당이라고 합니다. 일반 미사는 성 이시돌 센터에 있는 성당에서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까 들어오던 길목에 센터가 있었던 게 생각나 다시 차를 돌렸습니다. 성 이시돌 센터 입구에 주차를 하고 '삼위일체 대성당'으로 걸어갔어요.

 

천주교 제주 삼위일체 대성당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새미소길 15
(주일 미사 시간 : 오전 11시)

 

ⓒ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코로나 때문에 성당에 가지 않은지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낯선 성당에 앉아 있으니 기분 좋은 경건함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이 입장하시는데 어쩐지 걸음을 내딛으시는 뒷모습과 풍채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시는 외국인 신부님이셨어요. 알고 보니 성 이시돌 센터의 이사장을 겸하고 계시는 아일랜드 출신의 마이클 신부님이라고 하십니다. 1954년 버려진 황무지를 사서 이시돌목장의 부설 성당으로 이곳을 만든 아일랜드 태생의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님의 뒤를 이으셨다고 합니다. 수의사로 처음 성 이시돌 센터에 오신 마이클 신부님은 고국으로 돌아가셔서 사제 서품을 받으시고는 신부님이 되어 다시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먼 이국 땅으로 향한 이들의 숙명은 참으로 깊고 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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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가장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또 한 번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텅 빈 러시아 정교회 성전 안에서도 그렇게 빌었고, 마카오의 성당들에서도, 외할머니의 무덤 앞에서도 그렇게 빌었습니다.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면서. 이 날 마이클 신부님의 강론 중 기억에 남는 말씀들을 여기에 옮겨봅니다.

1. 가장 낮아지자.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고 진심을 다하자.
2. 어느 순간에라도 폭력성은 잠재울 것.
3. 나중에 부모가 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이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부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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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마이클 신부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왔다고 하니 여기나 거기나 바다 천지인데 왜 왔냐고 농담을 하시네요. 한 수녀님과 너무 오랜만에 본다며 인사를 나누시길래 두 분을 사진으로 함께 담아드렸습니다.

성 이시돌 센터 주변에는 성당 뿐만 아니라 은총의 동산에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수녀원, 야외 성당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면 산정호수 주변을 돌면서 연이어 묵주기도 15단을 바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의 미사가 열리는 금악성당 근처로 이시돌 순례길이 2017년 9월부터 조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행지에서 평온과 안식을 구하러 온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고요한 산책과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방문지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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