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공연 <다소 늦은 산책>

2019. 7. 9. 00:23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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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일을 끝내고 나니 잃었던 주말을 되찾았다. 그저께와 어제는 작업 과제와 공부, 글쓰기로 빼곡하게 채웠다. 토요일 저녁 시간을 후련하게 보내기 위해서 낮동안은 오로지 할 일에만 집중했다. 지금 하는 일은 파고들수록 해야 할 것들이 솟아난다. 요령 있는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주 이내 언니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고 공연 소식을 알았다.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디 밴드 '오늘도 무사히(오무히)'가 정규 1집 발매를 기념해 전국 투어에 나선 것이다. 이내 언니는 부산 공연의 오프닝을 밝힐 예정이었다. 장소는 스테레오북스. 찾아보니 광안리에 있는 음악 전문 책방이었다. 공연 날이 될 때까지 오무히의 음악을 유튜브로 먼저 만났다. 함께 갈까, 혼자 갈까 끝끝내 고민하다가 공연 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번은 홀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낯선 골목 도처에 수풀처럼 자라난 토요일의 열기를 헤치고 서두른 걸음 끝에 스테레오북스에 도착했다. 여덟 시 정각을 2분 남긴 터라 얼른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이내 언니와 눈이 마주쳐 멀리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잔뜩 쌓인 이야기가 언니를 보자마자 튀어나오려 안달이었다.

 

언니의 오프닝 공연에는 예전에 들었던 곡도 있고 처음 듣는 노래도 있었다. 아직 음원으로 들을 수 없는 '편지'는 꼭 필요한 문장이 담긴 책을 우연히 발견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기뻐하며 감상했다. 책이었다면 앞 페이지로 돌아가 문장을 다시 읽었을 것이다. 언니의 목소리 덕분에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소 늦은 산책> 공연 / 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 ⓒchaelinjane, 2019
<다소 늦은 산책> 공연 / 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 ⓒchaelinjane, 2019
<다소 늦은 산책> 공연 / 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 ⓒchaelinjane, 2019
<다소 늦은 산책> 공연 / 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 ⓒchaelinjane, 2019
<다소 늦은 산책> 공연 / 부산 광안리 스테레오북스 / ⓒchaelinjane, 2019

 

언니 무대 다음으로 오무히의 공연이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혼자 온 걸 사무치게 후회했다. 이 공간의 에너지를 내 소중한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었으면 좋았을 걸. 책이, 영화가, 음식이 다 줄 수 없는 위로와 에너지가 여기에 있는데. 이날 공연은 아껴 읽고 싶어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야 하는 책이었다. 다만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페이지가 넘어가기에 속수무책으로 감정이 차오를 수밖에. 피아노부터 대아쟁까지, 50mm 화각으로는 다 담을 수 없어 집에 두고 온 광각렌즈가 자꾸만 아쉬웠다. 대아쟁 연주는 처음으로 경험했는데 첼로가 흉내 낼 수 없는 감정까지도 느껴졌다. 바닷소리를 재현해내는 오션 드럼까지, 섬세한 디테일과 정성이 큰 감동을 만들었다. 보컬 태현 씨는 재치 있는 입담과 깊고 힘 있는 노래 사이를 자연스레 오고 갔다. 이렇게 평온한데 이렇게까지 훌륭한 공연이라니, 멤버들 한 분 한 분이 각자의 역할을 즐기고 편안히 해내버린다.

 

공연이 끝나고 음반을 구입해 사인을 받고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내 언니를 알게 된 초창기 때 공연을 보다가 만나게 된 봄날 지은 씨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영도에 있는 카페 '무명 일기'의 이야기를 들었고 지은 씨와는 또 조만간 만나 뵙기로 했다. 강아지 해피의 존재도 이날의 온기를 더했다. 예전의 나에게 부산은 떠나야 할 곳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과 공간을 늘여가며 보금자리를 풀어낼 곳이 되어가고 있다. 온실을 박차고 인생 실험에 나섰고 좀 더 건강한 풀이 되어 돌아왔으니 나는 인생 실험을 계속해나가야지. 인사를 마친 후 이내 언니와 함께 광안리의 밤 속으로 길을 나섰다.

 

언니와 밤 골목을 걸었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Street 27까지 700미터만큼의 시간이 있었다. 사람, 사랑, 일, 여행, 그동안 쌓인 시간 속의 말과 단어가 찬찬히 걸음을 따라왔다. 2014년 1월 19일 일요일, 언니를 처음 만난 그날도 우리는 보수동 골목을 구석구석 걸었다. 자존감이 바닥나고 큰 슬픔에 빠져 있던 그때, 언니는 동래구 칠산동에 있던 생각다방 산책극장으로 나를 초대했다. 특별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사람, 사랑, 인생, 공부, 엄마가 내 불안의 핵심 단어였지. 언니가 선물로 내어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과 존 버거의 <and our faces, my heart, brief as photos> 두 권을 품에 안은 채 깊은 위로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났다. 그날 나는 다이어리에 '보석을 만났어요'라고 적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 어느새 2층의 Street 27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와버렸다. 기정 샘과 마이크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에 자리를 잡았다. 공연 준비로 저녁을 거른 언니를 위해 이곳의 별미인 짬뽕 파스타를 주문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최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작업 이야기에 언니의 인맥과 상상력, 실행력이 더해져 점차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 변해갔다. 언니의 조언에 힘 입어 기록자로서의 삶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보기로 했다. 

 

우리 옆자리에는 기정샘과 오랜 친구분이 앉아 계셨다. 그분들과도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기정 샘이 언니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하셨다. 술 마시는 장소에서 노래하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던 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타를 꺼냈다. 마침 창가 벽 조명 아래에 액자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래를 시작하자 마이크는 없지만 그 공간이 언니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 곡 한 곡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중간에 들어온 손님들 중 마침 생일을 맞으신 분이 계셔서 언니가 즉석으로 생일곡과 '지금 여기'를 불러주었다. 구석에 계셨던 커플분이 언니를 찾아와 너무 감동을 받았다며 기타 가죽 스트랩을 선물하겠다고 치수를 재셨다. 게다가 나중에 오신 손님들은 타 지역에서 넘어오시느라 스테레오북스에서의 공연을 아쉽게 놓친 분들이셨다. 이런 우연과 만남이 짜인 단편 영화 각본처럼 펼쳐졌다. 언니가 마법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닐 텐데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언니에게 푹 빠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천천히 우직하게 걸어낸 사람만이 내뿜을 수 있는 선하고 맑은 냄새일 테지. 언니는 이날 트라우마가 깨졌다고 말했다.

 

이내언니의 즉석 공연 / Street 27, 부산 광안리 / ⓒchaelinjane, 2019

 

5년 전의 이내 언니도 충분히 자기답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이내'다워지고 깊어간다. 토요일 밤에 나는 언니에게 5년 전의 고민과 불안을 지금은 아주 많이 극복했다고 고백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꼭 필요한 성장이었다고. 5년 후의 나도 더욱 깊은 사람이었으면 한다. 모든 시도를 움츠리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분명 그런 존재가 되어있을 거야. 아 그리고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지금의 이내 언니 머리 색깔과 스타일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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